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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 시대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교회는 360년,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교회 대성당이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는지,
훗날의 재건 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명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최초의 정교회 대성당은 목조 지붕을 가진 바실리카였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는 그 위치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404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크리스소톰)를 추방시키는데 수반된 난동으로 교회가 소실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415년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도 현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바실리카이며, 현재에도 일렬의 원주와 주기,
장식된 대들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정교회 대성당도 532년 1월 니카의 반란도중 일어났던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나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다시 소실해 버린다.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후 소피아 정교회 성당의 재건을 결정하여, 그 설계를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에게 맡겼다.
공사는 5년 11개월이라고 하는 단기간에 종료되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맞이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메나스
총대주교에 의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 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서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모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거한(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후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너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톱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체 금지했다.


어찌됬든..... 복원 기술이 발전해서 아름다운 벽화를 다시 볼 수 있기를........


자료출처: 위키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