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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산대 배병삼교수(정치사상학)께서 따님에게 쓴 글입니다.
제 딸아이도 올 해 대학엘 들어갔습니다
.
저도 바로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
때로는 얼핏얼핏 장래에 대한 내 생각들을 해주기도 합니다만
.....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 옮겨 봅니다
.
저 뿐 아니라 여러분들께서도 같은 생각일걸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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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에게!

진작 네 아버지로부터 대학 진학 소식을 들었는데도
,
밥 한 끼 먹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

낯선 객지에서 강의 들으랴, 끼니 챙기랴 고생이 심하겠구나
.
30년 전 이맘때 네 아버지와 나도 설레며 대학생활을 시작했지
.

이 글은 대학에 남은 78학번 선배가 08학번 신입생에게 전하는

짤막한 당부쯤으로 들어주면 좋겠구나
.

조선소에서 몸통을 드러낸 배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

먼바다를 항해할 큰 배들은 나룻배와 달리 밑바닥 앞부분이

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지. 이걸 ‘용골’이라 한다
.

용골은 한바다의 풍랑에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쇠뭉치란다
.

그렇다면 배는 역설적인 몸뚱이다. 빨리 목적지까지 가려면

제 몸을 가볍게 해야 마땅한데
,
또 ‘제대로’ 항해하려 무거운 쇠뭉치를 매달아야 하는 역설 말이다
.

네가 대학에서 이런 역설의 이치를 깨달았으면 한다
.

대학은 말과 글로 이뤄진 곳이다. 말과 글에는 겉과 속이 있단다
.

현란한 주장, 두툼한 책에 쓰인 글의 속살을 꿰뚫는 눈을 길러야 한다
.

내용 없는 헛말, 증명할 수 없는 주장에는 속지 않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

해부학 시간에는 드러난 거죽 아래에 결이 다른 속살이 있음을
,
문학 시간에는 말글의 등 뒤에 또다른 뜻이 숨어 있음을 배우기 바란다
.

세상사 이치가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경망과 경박함으로 범하는 많은 잘못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니 늘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

그리고 잘된 답변보다 어설픈 질문이 낫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
교수님들은 잘 쓴 답안지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더 기꺼워하실 게다
.

허나 질문이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 법. 책을 내 식대로 읽고
,
낯익은 세상과 삶을 ‘낯설게’ 대하는 눈에서만 태어난다
.

도서관은 시험공부 하는 장소가 아니라, 질문을 만들기 위한

자료 창고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

(안목)을 기르는 데는 고전만 한 것이 없더구나
.

고전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져 나오는 샘 구실을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

허나 상상력이란 환상이나 백일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

고전을 창의력의 샘으로 지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과 세계의 근원성과

고유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곧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능이 아니라
,
고전에 담긴 근원성과 고유성을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력이란 멋대로 꾸는 망상이 아니라

그 속에 기본 문법이 깔려 있는 것이지
.
고전에서 추출한 삶의 문법이 앞으로 60년 세월의 난바다를 헤쳐

나갈 배의 용골이라고 나는 믿는다
.

세태가 흉흉해서 대학도 쓰임새 있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처럼 변한 지 꽤 되었다
.

기업이 요구하는 네모꼴·세모꼴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고

대학에 눈 흘긴 지도 꽤 된다
.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무슨 큰 자랑인 세태가 됐다
.
그러나 잊지 말아라
.
네가 기업이 요구하는 네모나 세모가 되어 그들의 쓰임새에 맞추고 난 다음에

또 너보다 더 정교한 네모나 세모가 나타나면 자연히 폐기처분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

이것이 ‘삼팔선’이니 ‘오륙도’니 하는 시쳇말의 근원이다
.

쓰임새 있는 인간, 실용주의 뒤에 숨어 있는 비인간주의를 잊어선 안 된다
.
나는 네가 세모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일지언정
,
너를 세모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

앞으로 헤쳐갈 60년 세월 속에 너라는 배는 높고

낮은 파도의 모서리에 치여 휘청거리기도 하겠지만
,

그러나 그 파도를 이겨낼 용골을 대학 속에서 만들어 내기를
,
또 고전 속에서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

건투를 빈다
.